어디로 가야 하나
-«그곳이 어디든»[1]에 대하여–
서문 (« 그곳이 어디든 »에 관하여)
이승우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은 2000년대, 프랑스에서 그의 첫 장편 « 생의 이면 »이 출간되었을 때였다. 당시 그 작품이 보여준 다성성, 훗날 작가가 되는 젊은 등장 인물의 억제된 폭력성, 그리고 그에 관한 작가 연보를 작성해야 하는 문학부 기자 ‘나’의 이야기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더랬다. 작가의 서사 진행 방식은 더없이 영리해서 적어도 나에게는 쉽지 않은 작가로, 아주 서서히 다가왔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소개된 장편 « 식물들의 사생활 »은 텍스트의 알레고리적 깊이와 함께 이 작가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는 매우 고유한 위치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프랑스에서 발행하는 한국 문학 웹진 <글마당>에 실린 몇 편의 서평과 함께 이승우의 작품 세계가 지닌 심오함은 서서히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고 짧고를 떠나 그의 작품들은 서로 닮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끈기 있게 같은 주제를 파고들며 인내, 두려운 진실, 지독하게 머리를 맴도는 강박, 열정 없는 희망에 다가서려는 의지라는 열매를 맺어 나가는지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눈에 도드라지거나 공공연히 내세우는 연관 관계가 없음에도 그의 소설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응답하고 교신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그 중 한 작품이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단어의 표면적 의미에서 벗어난다면, 하나의 작품은 텍스트들의 총체를 조망하며, 그것은 의도성을 띄지 않는다 해도 작가 개인의 신화가 표현되는 빈번한 주제, 사고의 연합, 강박적 이미지를 드러내는 일관성 있는 총체로서의 생산물이 된다. [2] 이렇게 보면, 한 작가가 늘 같은 이야기를 쓴다는 말도 결코 놀랍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한 작품은 주제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로 구성된다고 할 때, 소설적 상황, 등장인물들은 충분히 변화할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도 원초적 계획과의 부합 여부를 어그러뜨리지 않는다.[3] 루이 아라공이 말했듯, «내 안에 살고 있는 것과 나를 사로잡는 것»은 이승우의 작품 속에서 어떤 위협도 받지 않고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다.
항구적 욕망에 잠겨, 자신의 충동을 순화할 것을 강요당한 남자는 행복을 찾지 못한다. 그는 다만 별다른 피해 없이 생을 가로지르는 데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 원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 « 죄가 있으나 결백한 자»는 시련 속에서 구원에 이르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원하는 세상 속에 과연 구원은 있는 것일까?
만일 이승우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다성적이며 통시적인, 결코 허물어지지 않을 영감의 원천, 그 안에서 작가가 자기 작품을 일으켜 세우는 ‘성서’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지표가 밧줄을 끊어버린 세상, 사회적 유희가 생의 의미를 변형시켜버린 세상 속에서 성경은 작가를 위한 항구성, 지표,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된다.
독자는 텍스트를 배반하고, 비평가는 작가를 배반한다. 독자와 비평가는 그들 눈 앞에 놓인 텍스트가 알려지지 않은 어떤 길로, 목적지 또한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하는 자신들에게 모종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장편 « 지상의 노래 » 속 후가 그랬듯, 독자와 비평가는 그들이 작품 속에서 찾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늘이 그들로 하여금 비밀을 밝혀낼 일말의 단서라도 던져주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이리로 저리로 떠도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누리는 자유에 한껏 기대어 해석을 감행하고, 다시, 또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작품을 읽음으로써 텍스트들을 반향하게 하여 그 텍스트들이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게 하는 이유를 재발견하는 나의 기쁨에는 그 어떤 수치심도, 부끄러움도 없다. 해석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한번 만족했으나 또 다른 것을 파고 들어가는 욕망이 그렇듯이.
이 글은 현재 준비중인 이승우 평론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 그렇다면 이런 갈증과 이런 무능력이 우리에게 소리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옛날에 인간 속에 진정한 행복이 존재했었는데, 지금은 그에게 그 흔적과 아주 공허한 자국만이 남아 있다는 것, 그래서 눈앞에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얻지 못하는 도움을 존재하지 않는 사물들 속에서 얻으려고 찾으면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로 메워 보려고 쓸데없이 노력하지만 전혀 그럴 수가 없다는 것, 왜냐하면 이 무한한 심연은 무한하고도 불변하는 하나의 대상, 즉 신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면 메워질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4]
유는 부정한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는 추측하는 편이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지방 발령을 받은 유, 첫 번째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이 사건으로 유는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낸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유감으로 여길지언정, 저항은 하지 않는다. 유는 거기서 새로운 기회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물인 것이다.
유가 아내에게 자신은 서울을 떠나게 되었다고, 두 사람은 함께 서울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고 말하자 아내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여기에도 유는 짐짓 놀랄 뿐 성내지 않는다. (남편의 길을 따르지 않는 아내라니!) 술주정뱅이에 도박 중독, 빚더미에 몰려 죽음을 앞둔 옛 애인의 병상을 지키겠다고 당당히 마음먹은 아내에게 남편의 지방 발령은 오히려 절호의 기회가 된다. 아내는 결혼 당시 두 사람이 함께 정했던 관계의 기본 요건들을 근거로 남편과의 동행을 거부하고는 옛 애인에게 가겠다고 선언한다. 유가 아무리 전통적인 부부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따진다 한들 아내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아내의 의지는 완고하며, 그런 아내의 모습에 유는 미궁과도 같은 상념, 니체의 위버맨쉬(Übermensch, 초인)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유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구속성은 통속에 지나지 않는다 »(15쪽)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걸 실천에 옮기는 게 왜 하필 자기 아내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면, 두 사람의 관계에서 니체가 말한 초인(Surhomme)이란 사실 초여성(Surfemme)인지도 모르겠다. 사회 전반에서 남성이 주도권을 쥐는 한국 사회에서 유의 아내와 유의 관계는 결코 심상치만은 않다. 이렇게, 본사로부터 지방 발령을 받은 이유와 자신과의 동행을 거부하는 아내의 진짜 이유가 뭔지 추측하다 길을 잃은 그 순간 유에게 두 번째 패배가 닥친다. 유라는 등장인물의 존재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두 가지 중요한 실마리 즉, 일(한국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대상)과 가족(끝 없는 해체와 재구성을 반복하게 되는 대상)의 끈은 점차 느슨해지다 못해 종내 끊어지고 말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진 바 없는 유라는 인물은 이제 무력함(« 이해하지 못할 바에는 이해하지 않는 편이 낫다. 왜냐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 공감하지 못하는 포착이 울적한 기분과 시니컬한 심리 상태로 유도하기 때문이다.»(13쪽)) 속에서 계속해서, 규칙적인 동작으로 흔들리고 우리는 거기서 만성적 결정장애자의 모습을 확인한다. «이래저래 그는 서리로 움직이게 되어 있 »(10쪽)는 것이다.
그런 유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예수의 한 마디. «천국은 여기나 저기에 있지 않고 너희 마음속에 있다.» 이 세상은 유에게 아무것도 약속해주지 않는다. 그곳이 어디든, 자기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요, 오만한 과오일 뿐이다. 지방으로의 전근과 아내의 부재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순간 저항이든지 반항이든지 하는 말들의 의미는 전부 무너지고, 유는 이제 반항하는 인간이 아닌, «짐승처럼 구는» (61쪽) 한 인간이 된다.
서쪽에 위치한 외딴 읍소재지 서리. 한때는 중죄인을 귀양 보내는 유배지였다는 이곳은 외재화된 서양의 구현이자 무한한 잠재성의 기호가 된다.(이에 반해 동쪽은 중국식 우주생성론을 바탕으로 한 관조적 자연을 상징한다.) ‘재생’을 이 작품을 가로지르는 중요 모티프로 본다면, 재생은 그것이 이루어질 공간을 필요로 하며 그곳은 분명 ‘여기 혹은 다른 곳’이자, 특히 이 모질고, 몽환적이며 음흉하고 난폭한 인간으로 가득한 ‘여기’이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듯 떠도는 풍경(개인적으로는 전라도 담양의 서쪽, 바다에 잡아 먹힌 땅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때는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으나 지금은 어설픈 비즈니스로 돌아선 주민들, 가난한 자들이 얻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 바로 ‘여기’다.
‘여기’에서 유는 이제 강산종합리조트라는 부동산 컨설팅 회사의 서리 지사를 찾아내야 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물든 유의 회사는 서리에 유령 지사를 만들어두고 본사에서 함께 일하기 꺼려하는 직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지저분한 철문’이 유일하게 사무실의 존재를 알리는 곳, 대답 없는 전화벨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지고, 지사를 지킨다는 직원은 감감 무소식이다. 영문도 알지 못한 채 회사의 처사를 묵묵히 받아들인 유는 이렇게 서리에 도착하고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는 마을에서의 모험이 시작된다. 유는 서리 지사 사무실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하며 길을 헤매고, 몇 가지 질문을 던지지만 아무런 대답을 얻지 못한다. 마을 주민들은 조용하고 무심하며 적대적이다. 그 누구도 유에게 관심이 없고, 설사 있다 해도 그건 유가 가진 것을 빼앗고 속이거나 술집 왕국에서 붉은 격자무늬 남방셔츠의 사내가 그렇게 했듯 유에게 치욕을 안기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렇게 서리까지 와서 유는 야만적으로 흠씬 두드려 맞는다. 그러나 그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는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같이 묵직한 비밀을 품고 사는 것만 같은 마을 주민들은 어쩌면 유 자신보다도 먼저 그의 운명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서리 마을은 이미 시장 선출권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권력을 쥔 건달 무리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장편 « 한낮의 시선[5] »에선 부패한 정치인 무리가 등장한다.) 서리 마을에 드리워진 진한,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공포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건달 조직의 권력이었다. 하지만 유에게서는 일말의 비탄도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그에게서 엿보는 것은 고작 불안 정도. 그것은 결코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불안이다. 그것은 분명 유가 ‘이곳’ 사람이 아니며, 그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 어디나 고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디나 타지이고 이방이기 때문에 그곳이 그곳이었다. »(27쪽)라고 그 스스로 말하지 않는가.
불길한 예시를 남긴 꿈을 꾸고 나서 서쪽으로 가지 말라던 어머니의 충고를 유는 들었어야 했다. 어머니의 꿈 속에선 한 남자가 모래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모래 알갱이들이 서서히 남자의 몸 위로 쌓여가다 마침내 남자를 뒤덮는다. 남자의 몸을 완전히 덮어버렸을 때 모래는 돌연 공격 태세를 갖춘 음흉한 뱀으로 변해 스르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이 뱀은 하느님이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뱀으로 둔갑시켰다가 도로 지팡이로 만든 모세의 지팡이와는 다르다.(탈출기IV-3) 그보다는 오히려 이브를 유혹했다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하느님으로부터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으라는 저주를 받은 뱀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창세기III-4) 뱀과 서쪽 방향은 곧 위험과 연결된다. 아무래도 유는 어머니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시편에서도 이렇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편103-12)라고.
땅과 산을 대신하는 모래는 성경 속 군중과 등가 관계를 이루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숱한 과오를 상징하기도 한다. 어디든 침투하기 쉽고 유약하고 무른 모래, 휘몰아치는 바람에 날려가기 직전의 모래의 모습은 땅을 기는 뱀과 동일시된다. 작품 속에서 모래는 물질의 상징이자 후퇴의 모티브가 되어 지상의 가장 깊숙한 곳을 상징하는 존재가 된다. 모래는 어두운 세상이 되고, 이제 거기에서 뱀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와 생과 사를, 경우에 따라서는 삶 아니면 죽음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뱀은 오토 랑크[6]가 말하는 원형의 총체가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여기서 성적 의미는 거드는 것일 뿐 중심이 아니다. 어둡고 후미진 곳에서 스르르 나타나는 뱀은 바슐라르가 말하는 «곧고 둥근, 순하고 단단한, 부동이거나 민첩한»,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이중적 이미지를 간직한다. 남자는 자기 욕망의 고삐를 풀어 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리하여 유혹이 남자의 몸을 감싸 어둠 속으로 다시 내쫓는다. 이것은 그러므로 모성 회기의 꿈 내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꿈의 다른 모습이다. «내장에도 동굴이 있는지, 벽에 부딪쳤다 튕겨 나오면서 부풀어 오른 그런 소리가 가슴 저 안쪽에서 울렸던 것 같기도 하다.»(42쪽)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듯이.
그럼에도 유는 서리로, 서쪽으로 갈 것이다. 사나운 짐승의 울음처럼 몰아치는 바람, «기다렸다는 듯» 와락 달려들어 입 속으로 들어와 폐를 틀어막는 모래 흙먼지. 필시 복음서 속 예수의 말, «천국은 여기나 저기에 있지 않고 너희 마음 속에 있다.»에서 끄집어내었을 법한 표어, «어디에 계시든 편안하시길 바랍니다.»에도 불구하고 냉담하기만 한 주민들.
상황이 이러할 진데 스스로를 지키는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상이란 우리를 앞서간 것들에 의해 조건 지어 지는 법이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꿀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된다. 우리에겐 선택할 권리만 주어졌을 뿐 거절할 권리가 없다. « 가면의 생(Pseudo) » 속 로맹 가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모두 얹혀진 존재’일 뿐이라고. 그의 단언에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다.
«내가 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것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세계는 나에 앞서 이미 이루어져 있다.(…) 유는 얼굴을 찡그리며, 빌어먹을, 아, 빌어먹을, 이런 거지 같은… 하고 구시렁거렸고, 그럴 때마다 입 속으로 흙먼지가 숭숭 빨려 들어왔기 때문에 기침을 했고, 이내 입을 다물어야 했다.»(28-29쪽)
서리 마을의 그 누구도 유의 지극히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몰라서인지, 감추고 싶어서인지 그 이유를 도무지 가늠하지 못하는 유는 «도깨비바늘에 맨살을 스친 »(44쪽) 느낌이 되고, 매 순간 옆으로 몸을 돌릴 때마다 (위험은 절대로 정면에서 오지 않는 법이므로.) 흙먼지 구름이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전근을 임명 받은 지사가 마치 유의 처지와 마찬가지로 지상으로부터, 부부 관계로부터, 본사로부터 뚝 떨어진 마을에 자리한 유령 회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무섭게 유는 도무지 이해 불가능한 일련의 사건들처럼 허공에 붕 뜬 채 두 가지 서로 다른 세상 사이에서 부유한다. 이로써 카타르시스나 모색이 들이닥칠 조건은 충분해진다. 구원은 그 다음 문제다. 유가 묵는 여관 방에 식당 여자가 여관 방에 ‘아가씨’를 들여보낼 때, 유의 동의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유는 다만 만성적 유약함으로 ‘아가씨’를 받아들이고 침대 가장자리에 그녀와 나란히 걸터앉는다. 거기서 유는 «광야처럼 까마득하게 넓게 벌어지는»(73쪽) 관계를 느끼며, «사나운 개처럼 컹컹대는 바람과 날리는 흙먼지와 지저분한 거리와 금방 무너질 것 같은 담벼락에 붙어 있던 경고문과 우울하고 불친절한 사람들»(71쪽)을 떠올린다.
돌연, 선택하지도 않은 운명의 마리오네뜨가 되어버린 유, 분명 누군가 그에게 장난을 걸고 있다. 유의 눈엔 사람들 모두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등 뒤로는 사악한 모종의 수작들이 꿈틀댄다. 카프카의 «성»에 등장하는 K가 그랬듯 불가사의한 힘의 표적이 된 유도 여지 없이 도망을 친다. « 객관의 입장을 견지하고 살피는 경향 »(113쪽)»이 되어 « 육체가 지배자로 있»지 않게 하기 위해(254쪽) 이따금 죽음이나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주인공을 스쳐간다면, 그것은 상실과 박탈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 늪에 빠진» (p. 198) 듯 차꼬를 안 찬 죄수가 되어버린 유. «바깥을 감각하는 기관인 육체가 지배자로 있는 한 인간에게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없다.» (p. 254)
겉보기와 달리, 유는 천진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고 느낄 줄 아는 인물이다. 자신이 무엇의, 누구의 장난감이 되었는지 유는 알고 있다. 다만 바깥 상황들이 유의 의지를 조정할 뿐.
« 상황은 외부의 조정기가 되어 원격으로 그의 움직임을 조정한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의지는 아주 조금 작동하거나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외부의 조정기가 의지의 기능을 지속적으로 대신하게 되면 의지는 곧 퇴화하고 말 것이다. »(89쪽)
유가 직면한 건 통찰력이나 분별력의 부재가 아니다. 유를 사로잡아 이중적 태도를 야기하는 것은 무기력증이다. 자신에게 닥친 사건들에 관한 한 명료히 깨어 있는 유, 그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가를 치르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행위 중인 자기 모습을 들여다본다. 대체 이 모순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이러한 각성의 부재는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유는 스스로를 위한 방어 기재가 없다는 사실에 무섬증을 느낀다. «나는 매사가 그렇게 흐물흐물한 편이다.»(14쪽)»라고 말할 때 유는 «생의 이면[7]»의 박부길과 같은 처지가 된다. 그런 유는 주도권과 결정권을 은근슬쩍 아내에게 넘겨버린다. «그 역시 내심 동행을 원하지 않았으면서도 그녀에게 분명한 거부 의사를 먼저 표현하게 하고, 자기는 피해를 당한 거라는 유의 의식을 배양한 것이라면, 그렇게 함으로써 가해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 것이라면, 피해자라는 가면 안쪽의 안락함을 도모한 것이라면, 교묘한 쪽은 유가 된다.» (26쪽)
이런 유에게 모든 일은 도무지 극복해낼 수 없는 시련이다. 유에게는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이의를 제기해보자는 의욕이 없다. «사나운 개처럼 컹컹 짖어대는 바람과 바람에 날리는 붉은 흙먼지들과 진드기가 달라붙는 듯한 끈적끈적한 공기와 지저분한 길거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투덜거릴 수는 있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27쪽)
스피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들은 우리가 다른 것 없이 자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인 한에서 작용을 받는다.[8]»라고. 우리는 우리를 무장해제시키는 자 앞에서 수동적이 된다. 유는 그의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욕망의 세계 안에서 길을 잃은 외톨이이자 자기 욕망의 희생자이다. 무장해제된 유는 마을 사람들의 소리 없는 폭력에 포위당한 채 방향을 잡아보려 기를 쓸 뿐 저항하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저항하는 것은 탄압에 대한 정당화와 인정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다행히도 유는 저항에 유죄 판결을 내린다. 유는 이제 알베르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L’Homme révolté)» 속 한 구절, «우리 안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반항하는가?»을 몸소 실천하며, 반항의 부재를 전재로 하는 이 자기 상실의 상태 속에서 유는 이렇게 공언한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싶거나, 자기 안의 다른 존재를 불러내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다.»(102쪽) 서리 마을 주민들이 구현하는 ‘악’을 맞닥뜨린 유. 그는 철회와 저항의 부재에, 번개가 내리치면 사라진다는 형벌을 받은 세상 속에서나 가능한 변화를 대응시킨다. 구태여 거부하지 않아도 어차피 사라져버릴 세상. « 나는 이 구조와 아무 상관 없다. 맞서서 저항할 만큼도.[9] »
닫힌, 익명의 세상을 상징하는 서리 마을. 불량배들이 장악한 이 마을에 대한 묘사는 빈약하고, 이는 잔뜩 억제되고 움츠린 마을의 생명력에 대한 묘사 아닌 묘사가 된다. 여기에 노아 노인의 동굴이 열린 세상으로서 맞선다. 마을을 둘러싸고 이따금 이따금 스스로 환한 빛을 뿜어내는 산은 그 안에 동굴을 품고 있다. 서리 마을이 닫힌, 움직임 없는, 자기만의 법을 만들어 자기를 향해 단단히 접힌 세상, 지형적 조건만큼이나 부조리하고, 세상의 모든 해로운 양심들을 품은 세상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동굴이, 내일의 세상이 있는 것이다. 불량배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노아에게 넘겨준 동굴이 있는 그곳. 닫힌 세상은 독재자의 세상이지만, 그 세상이 끝나는 곳에 정직한 땅이 기다릴 것이다. 퇴락한 세상의 알레고리, 서리 마을은 버려진 땅에 무법지대가 형성될 때까지 모르쇠로 일관한 무능한 국가의 상징이다. 이렇다 할 원인도 없이, 그러나 모든 반응을 통째로 마비시키는 통제 불가능한 사건들이 조성하는 공포가 서리 마을을 장악한다. 모래로 덮였다가 바람이 쓸어가 버리는 세상. 그것은 어쩌면 땅 속에 지었다는, 그 안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왕국이 있었다는 고대 세상의 침전물을 상징하는 건지도 모른다. 몸 파는 여자가 지갑과 신분증, 신용카드를 전부 훔쳐 달아나고, 유는 이제 아무것도,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된다. 신분증이 없으므로 이제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낼 수 없다는 무섬증을 유는 거듭 확인해 나가면서, 한때 사회와 맺었던 협약들은 이제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은행이든 파출소든 틀림없이 깡패들의 입김이 미치는 은행과 파출소는 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지 않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가 옛 애인의 빚을 갚아주려고 자신과 함께 살던 집을 미련 없이 팔아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는 이미 종말에 성큼 다가서 있다. 다시 말해, 유가 서리 마을에 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알몸에서 신에게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무게를 줄여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 건 루이 칼라페르트(Calaferte)[10]였다. 위험이란, 카뮈가 «반항의 중심에는 나의 동의가 잠자고 있었다.» 라고 고백했듯 («반항하는 인간»), 무엇이 자신을 그토록 오랫동안 괴롭혔는지 비로소 발견할 때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세상을 바꾸기를 단념하는 것은 저항에 대한 단념에서부터 시작된다.
유에게는 스스로 발견하지는 못했으면서 시련이 닥쳤을 때면 거기에 맞서게 만드는 벙어리 같은 힘이 잠재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건 비행동, 행동이 아닌 행동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행동이 아닌 행동을 찾아 유는 한밤중에 신비하게 빛을 발한다는, 그러나 서리 마을 주민들 눈에조차 웬만해선 포착되는 법이 없는 빛을 품은 산에 다가선다. 그 산 속, 그리고 굴 속에선 마을 사람들이 미친 늙은이라고 부르는 노아가 돌로 작은 집들을 짓고 있다. 그것은 무덤이 아니라 어쩌면 무덤 반, 거주지 반인 돌무더기일 것이다. 오직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지붕 위로 솟은 일종의 지하 납골당이 거기에 있었다. 협소한 그곳은 다시 한 번 «생의 이면»의 스튜디오를, «지상의 노래»의 독방을, «욕조가 놓인 방[11]»의 욕조를, «한낮의 시선 »의 호텔방을 만나게 해준다. 인간이란 자기 몸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법. 그렇지 않다면, 그건 신과 맞짱 뜨는 일일 것이다. 협소함이란 오히려 그것을 통해 자기 몸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노아는 «식물들의 사생활[12]»(2000) 속에서 상흔으로 남고, «지상의 노래[13]»(2012)에서 작가가 집요하게 고발한 군사 독재 시절 반정부 활동으로 호된 대가를 치른 인물이다. 서리 마을에 와 노아는 레스토랑 ‘왕국’을 열었고, 그곳이 이제는 불법 도박과 밀거래를 일삼는 한 무리 범죄자들의 소굴이 되었다. 유가 흠씬 두드려 맞는 치욕을 겪은 곳도 바로 이곳, 유배지의 왕국이다.
이제 유는 산을 올라야 한다. 산을 오르며 그는 단 두 번만 넘어질 것이고, 거기엔 노아와 그의 기이한 노동을 만나러 가는 길을 인도해주는 매개자, 다름이라는 이름의 검둥개가 있다. 망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개. 성경에서 추방된 짐승, 아누비스의 먼 친척. 하지만, 이제 인간들 사이 중재자 역할을 임명 받은 이 개는 산과 퇴락한 현세의 또 다른 상징인 폐교 사이를 오고 가고, 이 폐교에서 숙식하는 노아의 딸은 ‘일기 같은 것’(169쪽)을 쓴다. 유는 단편 «오래된 일기[14]» 속에서 밤마다 사촌의 일기장을 훔쳐 읽던 ‘규’를 흉내 내며 여자의 일기를 읽는다. 고백 형식의 이 일기는 그녀와 유가 나누는 장거리 대화의 연락소 구실을 맡는다. 어쩌면 유의 삶의 요약본이 될 수도 있을 이야기를 그녀는 이렇게 적어두었다.
«나는 성공하려고 애쓰지만 그러나 내 안에는 실패하기를 바라는 보이지 않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번번이 실패한다. 그래서 심지어 스스로 돌아온다.»(222쪽)
유를 변화시키는 건 유배지에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제이다. 재생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는 광야에서 길을 열어 강이 흐르게 하실»[15] 그날을 기다리며 영원의 세상으로 삶은 계속된다. 상실을 예언한 세상의 아우성으로부터 멀찍이, 그리고 깊숙이 들어가 쿰란 동굴 속에서 성경을 필사하여 사해사본을 만들고, 신과의 합일 속에서 세상을 이룩한 에세니파들과도 같이.(이에 관한 이야기는 « 지상의 노래 »에서 재등장한다.) 신명기 23장18절에서 내쳐진 개와 창녀들이 저마다 자기 자리를 찾듯 서리 마을의 몸 파는 아가씨 역시 동굴 속으로 합류한다. 노아의 약속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동굴을 찾은 유는 돌기둥 집에서 아주 오래 «깊고 달콤한 잠»(264쪽)에 빠진다. 이것은 어쩌면 그가 이제 막 우주를 닮은 세상을 다시 창조한 것과 같은 행위로 보아도 되는 걸까? 신에게만 주어진 과업을 유가 해냈다는 걸까.
«어떤 지역에 정착하고 주거를 건립하는 것은 항상 전체 공동체와 개인 양자에게 중대한 결정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주거를 선택한다는 것은 세계의 창조를 시도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들의 작업인 우주 창조를 모방할 필요가 있다.»[16]
거기서 유가 발견한 것은 행복의 시작점이 아니라 휴식이다. 그러므로 몇 페이지 뒤 두 개의 서로 다른 세상의 경계에 선 순간을 한껏 만끽하는 유의 모습에 우리는 그다지 놀랄 이유가 없다. (285)
«신경과 정신이 서서히 이완되면서 몸이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의식이 서서히 찾아오는 참이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어디쯤에서 그는 얼굴에 닿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드럽고 축축한 감촉을 느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려는 감각과 그것을 무시하고 내처 땅속으로 스며들고자 하는 의식 사이에서 얼마간 부대꼈다.»(266-267쪽)
이것은 혹시 죽음에 대한 꿈인 걸까? 하지만, «동굴은 우리가 끝이 없는 꿈을 꾸는 피난처이다. 동굴은 즉시 보호받는 휴식, 고요한 휴식과도 같은 꿈을 느끼게 해준다.»[17]는 바슐라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구태여 죽음을 떠올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테라 마테르(가이아, 대지의 어머니-옮긴이)를 기다리며, 유가 들이마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이다. 흙 속 깊숙이 들어가 가이아의 가슴을 되찾는 것, 그것은 태초의 공간, 순수한 의도를 되찾는 행위이다. 동굴 속에서 이처럼 모든 욕망, 그의 신분을 규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가벼워진 유는 이제 영적인 재생을 감행한다.
한국 무속 신앙에서 동굴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제주도 남쪽 중문에 위치한 봉향당이라는 동굴은 오십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안쪽 아주 깊숙한 곳에는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제주도 남원면 역시 이 같은 종류의 동굴을 두세 개 품고 있다. 제단은 분명 이 동굴들을 신이 살던 곳으로 여겼던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둔 것이다. 또한,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가 인간이 되기 위해 시련을 감수해야 했던 곳 역시 동굴이다.
이따금 난파 위기의 영혼들을 비추는 서산봉에서 뿜어내는 설명할 수 없는 빛. 지켜보는 이들에게 그 빛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열망이다. 고구려와 신라 건국 신화에서 산과 빛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바라보는 자에게만 속한다는 이 산은 창조자의 항구성, 영원성을 위한 이상적인 성소(聖所)가 된다. 산은 성스러운 차원으로까지 솟아오르고, 물이 가진 비영속성에 대적하며 그 가슴 한가운데에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품는다. «은밀한 예배, 비밀스런 의식, 입문을 위한 행위들이 천연의 신전과도 같은 동굴 속에서 이루어진다.[18]»
이따금 불그스름한 빛에 휩싸이는 이 산의 변화를 서리 마을 주민들은 감지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이 빛은 아주 가끔씩, 아주 짧은 시간에만 산을 휩싸는 걸까. 왜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걸까. « 글쎄, 산이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선택하는지…» (63쪽)
성경 속에서 노아는 아담 이래 퇴락한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줄 방주를 지었다. 서산봉이 뿜는 간헐적인 빛은 부재하는 신을 대신하고, 그것의 산발적 현현은 또한 꺼져가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분출되는 성욕을 상징하기도 한다. 성경 속에서 산은 신세계, 즉 홍수라는 상징으로 구현된 난파의 세상으로부터 구출된 세상을 알리는 공간이다. 꺼지지 않는 영원한 빛이 등대, 도달할 지점, 목표를 이루어줄 것이다. 여기서 빛은 가까워지는 신현(神顯)이자 경보로서, 오로지 경보만이, ‘예정되고 선택된 자들[19]’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신적 구원에서 멀찌감치 비껴 서서 자기 마음이 가는 쪽만 빛을 비추는 서리 마을 주민들은 이 빛을 볼 수가 없다.
유에게, 잊어야 하는 필요성은 점점 절박해진다. 서리를, 이 저주받은 공간을, 부조리 가득한 만남들을, 자신을 감시하는 위험들을 잊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아내가 그를 잊었고, 그의 상사가 그를 잊었다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가 별개가 아니라 점차 무너져가는 사회의 두 가지 기둥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잊는 것이다. 또한 세 번째 기둥인 국가 역시 서리 마을을 무법자들의 손에 넘겨버렸다는 책임이 있다. 아노미 현상을 향해 점점 미끄러지는 이 상황은 유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열어주는 필요충분 조건이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다가가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자들의 이야기를 들추어내야 한다. 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망각과 상실이 전제되어야 하는 법. 기억, 상처, 쾌락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성공을 하고 누군가는 실패를 한다. 그리고 망각과 상실이 불가능할 때, 이 작품 도처에 널린 물과 불이 정화와 화해의 역할을 하며 등장 인물이 이 딱한 공간 속에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재생을 위해서는 분해와 해체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흔들리지 않을 한 가지 사실은, 이 작품은 «그곳이 어디든»(« Ici comme ailleurs » 이 책의 불어판 제목이다-옮긴이)이지 «그곳 아니면 다른 곳»(Ici ou ailleurs)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뱃속을 향한 느슨한 하강(또는 상승)이 진행되는 곳은 바로 여기(ici), 틀림없는 여기이다. 불을 가지고 노는 세상 속에서 안전을 약속하는 양수(羊水)로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곳, 새로운 출발은 역설적으로 아직 열기를 간직한 파괴와 폐허의 잿더미 위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이승우가 묘사하는 사회란 다름 아니라 ‘해체’야 말로 모든 움직임의 중심을 차지하는 병든 사회이기 때문이다. 사랑, 존중, 우정, 신뢰, 종교적 감정 등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폭발의 잔여물들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노아가 대홍수에서 구하려 애썼던 방주 또는 사막에 지은 선지자 이사야의 집에 머물게 된다. 선지자 이사야는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의 부도덕함을 꾸짖고, 이스라엘의 왕은 바빌론의 왕들에게 점령당했다. 바빌론에게 점령당해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탐색은, 이야기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아도 성적 의미가 부여된 죽음의 환상을 재현하며 끔찍하게 존재성을 알리는 소설 속에서 쉼 없이 수행된다. 그렇지만 그 어떤 유희도 이 작품 속 등장 인물들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지드적 영향[20](l’influence gidienne)은 곧 희미해진다. 이의를 제기하려 애쓰지 않는 이에게 유희란 없는 법이다. 개인적 문제와 직업적 부조리 사이에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세상을 인식함으로써 유의 상황 분석 능력은 정지 상태에 가까워진다. 그의 삶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저항이나 이의 제기가 아니라 인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이승우의 작품이 지닌 참여 또는 후퇴라는 끔찍스러운 딜레마를 발견한다. 그 누구도 유를 구하러 가지 않을 것이며, 오로지 원초적 과오로의 회귀, 그것을 돌이키는 회기라는 유일한 가능성만이 구원, 개인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예견되지 않은 행동에 의한 구원을 허락해주는 것이다.
노아는 «‘저기’의 무엇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붙들려 있는 한 ‘여기’에 몰두할 수 없다»(p. 156)고 충고했으며, 유에게 그것은 발현(發現)과도 같다. « 그가 주인이 아니고, 내가 새로운 주인이라면? 단지 그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밖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라면? 그 때문에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겪은 거라면? »(p. 190)
자기 욕망의 대상이 된 유에게는, 그 욕망들을 던져버리기 위해 노아의 욕망을 흉내 내겠다는 가능성만이 유일하다. 그리하여 유는 그를 도와 집을 짓기 시작한다. 이 점에서 노아는 유가 그 자신의 욕망을 그보다 더 큰 다른 욕망으로 교체하기 위해 받아들인 모델이 된다. 우리가 열정에 맞서 싸우거나 욕망을 축소하거나 혹은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이성이 동반되지 않는다. 거기엔 다만 이성이 아니라 열정 혹은 그보다 훨씬 더 큰 욕망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한 것은 스피노자였다. 육체적 욕망보다 더 힘이 센 어떤 것, 성적으로 대상화되지 않았거나, 적어도 완전히 그렇게 되지는 않은 그런 욕망, 그리하여 존재하는 쪽으로, 존재의 인내 쪽으로, 자기 보존의 힘(le conatus[21]) 쪽으로 향하는 것. 그것은 오로지 휴식을 향한 꿈으로만, 동굴 속 돌멩이들 사이사이에 잠긴 어둠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 이 새로운 욕망에게는 그것을 묶어둘 도구가 필요할 것이므로. 이렇듯 « 타자의 본질 속으로 녹아 들어가려면 자기 스스로의 본질 속에서 불굴의 증오를 겪어내야 하는 [22] »법이므로. 아내가, 죽어가는 옛 애인을 데리고 예고 없이 들이닥쳤을 때 유는 그를 등에 떠메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집이자 무덤인 그곳, ‘해지는 쪽’에 태아 자세로 눕힌다.
재생, 모성 회귀, 성스러운 것으로의 귀환을 이야기하는 이 소설에서 벽지로 떠나는 행위는 길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근원의 회복이다. 등장 인물이 스스로를 엄마 자궁 속 태아 자세로 잠들었다고 묘사할 때 확인할 수 있듯, 이것은 잃어버린 대지, 무서움으로부터 보호받은 세상, 자궁으로의 회기, 신성한 바람을 간직하고 이따금 생생한 빛을 발하는 산, 그리고 모든 과오를 씻어 내려주는 비를 갈망하는 소설인 것이다.
막스 베버는 신성한 것의 후퇴가 인간 활동의 합리화를 촉진시켰다는 사실을 증명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 «그곳이 어디든»에서 합리적인 활동, 즉 노동, 사랑, 부조리에 닿을 때까지 임무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유의 의지는 서서히 조각나고 잘게 부서진다. 지방 발령을 임명 받은 상황이나 그를 떠나겠노라고 선언하는 아내와의 갈등에 대한 작품 도입부의 교육자적인 태도는 (여기에 남편의 이성적인 분석에 맞서 사랑의 감정을 앞세우는 아내의 묘사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자아 추출과 실종만이 새로운 기반을 허락한다는 합리화된 세상 속 신성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이 작품의 핵심 열쇠를 쥔 부분으로 이어진다. 르네 지라르는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서 흉내내기를 향한 인간 욕망의 문제를 조명한 바 있다. 욕망이란 결코 어떤 사물을 향한 욕망이 아니며, 사물을 소유한 타자를 향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모방이라고 할 때 타자는 매개자가 된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모방만이 인간을 상승시켜주며, 폭력 속으로 침몰하는 것을 막아줄 수 있다. 여기서 신이 완벽한 인간을 이루는 두 가지 조건, 즉 박해와 십자가형을 만나게 하는 장소로 도스토예프스키가 한번 더 환기된다. 더군다나 유가 죽어가는 옛 애인에게 마지막 매무새를 만져주며 희생적 제의를 치르는 것은 제자들의 발을 물로 씻어주는 그리스도 흉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소설 «악령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만들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다. 유는 빛의 간혹 비칠 뿐 어둑어둑한 언저리에서, «악령들»에 등장하는 거미와 대칭을 이루는 개 한 마리를 동반한 채 서성인다. «사랑의 죄악» 서문에 사드 백작은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인간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관련이 있으며 존재의 특징을 이루는 두 가지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디서든, 기도해야 하고, 어디서든, 사랑해야 한다.» 종말을 향해 내달리며 마침내 산이 진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우리는 대홍수의 시간에 닿아 있으나, 대홍수는 행복의 시대를 열어주지 않는다. 속죄의 길이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화산 폭발. 산꼭대기가 열리고 서리 마을을 삼킨다. 악도, 그렇게 함께.
타뷸라 라사[23]
그리고 이제 여기서 «지상의 노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Jean-Claude de Crescenzo 장클로드 드크레센조 (프랑스 액스-마르세유대학교 한국학 주임교수, 한국문학전문 문예지 « 글마당 »대표, 한국문학전문 « 드크레센조 출판사 » 창립자)
번역: 이현희(문학번역가, 프랑스 부르고뉴-프랑슈 콩테대학교 비교문학전공 박사 과정)
[1] «그곳이 어디든», 2007, 현대문학 ; Ici comme ailleurs, Choi Mikyung, Jean-Noël Juttet 불역, 2012, Zulma.
[2] 샤를 모롱, 강박적 은유로부터 개인적 신화까지(Des métaphores obsédantes au mythe personnel), 조제 코르티, 1962
[3] 피에르 마르슈레, 문학 생산의 이론을 위하여(Pierre Marcherey, 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 프랑수아 마스페로, 1970.
[4] 블레즈 파스칼, « 팡세 », 1685년 6월의 계획, 최고 선, 김형철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10. 5 전정판. p. 106
[5] «한낮의 시선» 2009, 이룸 ; Le Regard de Midi, Choi Mikyung, Jean-Noël Juttet 불역, 2014, Decrescenzo Editeurs.
[6] 분석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제자이다.
[7] «생의 이면», 1993, 문이당 ; L’Envers de la vie, Ko Kwang-Dan, Jean-Noël Juttet 불역, 2000, Zulma.
[8] 에티카, 스피노자 지음, 강영계 옮김, 서광사. 1990. p. 249.
[9] 월트 휘트먼, 풀잎. 1855.
[10] 프랑스 작가(1928-1994).
[11] «욕조가 놓인 방», 2006, 작가정신 ; La Baignoire, Choi Mikyung Choi, Jean-Noël Juttet불역, 2016, Serge Safran Eds.
[12] «식물들의 사생활», 2000, 문학동네 ; La vie rêvée des plantes, Choi Mikyung Choi, Jean-Noël Juttet불역, 2006, Zulma .
[13] «지상의 노래», 2012. 민음사 ; Le Chant de la terre, Kim Hye-gyeong, Jean-Claude De Crescenzo불역, 2017, Decrescenzo Editeurs.
[14] «오래된 일기», 2008, 창비 ; Le Vieux Journal, Choi Mikyung, Jean-Noël Juttet불역, 2013, Serge Safran Eds.
[15] 이사야, 41장 19절.
[16] 성과 속, 엘리아데 지음, 이은봉 옮김. 1998년. 서울. 한길사. 77쪽.
[17] 가스통 바슐라르, id°, P. 208.
[18] 가스통 바슐라르, ib°, p. 206.
[19] 예정. 기독교 신학에서는 구원론과 관련하여 성도에 대한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선택하는 것에 대한 용어이다. 예정설에서는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는 인간을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설명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주권을 강조한다.
[20]가족 제도에 아버지의 조기 상실, 어머니와 종교의 존재가 미치는 영향을 지칭한다.
[21] 라틴어로 ‘노력’이라는 뜻을 지닌 conatus의 번역. ‘자기 보존의 힘’이란 « 각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힘이 그 사물의 현실적인 본질과 다른 것이 아니다 »라고 스피노자는 주장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인과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스피노자는 자기 보존의 힘을 각 사물의 본질로 설정하는 것이다. (에티카, 제3부, 정리 7 , 책세상, 조현진 옮김 참조)
[22] 르네 지라르,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René Girard, Mensonge romantique et vérité romanesque.
[23] Tabula Rasa, 원초적 상태, 0의 상태로의 복귀.